지난 8월 22일 민주노총 정책 대의원대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은 ‘정치전략’ 안이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해 ‘진보대통합 정당’을 건설하자는 ‘정치전략’ 안은 뜨거운 논쟁 끝에 통과되지 못했다.일부 인터넷 진보 언론은 “민주노총 주도로 진보대통합과 진보 정당 건설에 나서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는데 “소수 반대와 무책임한 회의 운영”으로 그 열망을 저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다. 그날 많은 대의원들은 정의당을 포함해 복수의 진보·좌파 정당이 있으므로 정치적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 민주노총 주도의 단일 정당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노동조합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진보 정치 운동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었다.
‘진보대통합 정당’을 건설하자는 주장의 핵심 논리는 ‘박근혜 정권 하에서 민중은 살 수가 없다. 진보진영이 분열해서는 이길 수 없다. 내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주도해서 단일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지난 3년간 박근혜 정부 하에서 노동계급이 겪은 고통을 단일 진보 정당 부재에 따른 단결 부족에서 찾는 것은 제도권 정당 건설을 제일 중시하는 특정 정치 경향의 평가일 뿐이다. 당장 지난해 공무원연금 반대 투쟁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충재 전 공무원노조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와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 같은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그는 경제 위기 시기에 투쟁을 통해 개혁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공무원연금 개악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공적연금을 강화하자고했다.
공무원연금 같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요구를 전면화하지 말고 공적연금 강화 같은 ‘국민적’ 요구를 제시해야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노조 지도자의 투쟁 회피주의와 결합한 민중주의 정치는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와 공적연금 강화를 이룰 진정한 동력인 현장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고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공무원연금만 개악되고 공적연금도 강화되지 못했다.
둘째, 진보진영의 단결은 중요하다. 문제는 어떤 단결이냐다. 제도권 정당 건설을 가장 중요한 단결의 기초로 여기게 되면 오히려 노동조합이 분열돼 노동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
현재 진보·좌파 정치 세력은 정의당계, 노동당계, 자민통계, 급진좌파 계열 등 여럿 존재한다. ‘진보대통합 정당’은 이 중 특정 정치 경향만 지지할 뿐 나머지 정치 세력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되는 ‘진보대통합 정당’은 사실상 특정 정치 경향이 주도하는 정당이 될 공산이 크다. 이것이 어떻게 ‘진보대통합’인가.
이런 발상은 특정 정치 경향이 정의당을 노동자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정의당은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개혁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ㅠ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말하는 “헌법 안의 진보”가 뜻하는 바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기본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분업을 지향한다. 경제 쟁점은 민주노총 같은 노동조합이 다루고 주로 선거를 가리키는 정치 쟁점은 정당이 다루자는 것이다. 심상정 대표가 오래 전부터 역설해 온 “민주노총 당 극복”은 이런 역할 분담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지, 민주노총과의 단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정치와 경제의 분업은 노동조합 부문주의를 고착시키는 약점이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42%가 정의당을 지지했다. 정의당의 당원과 투표 기반은 주로 노동계급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당을 노동자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의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무시하거나 그들과의 공동 행동을 고려하지 않는 종파주의적 태도다.
이처럼 현실에서 민주노총 주도 ‘진보대통합 정당’은 민주노총에게 특정 정치 세력의 정당을 건설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다른 세력이 원하지 않고 반대하는 정치 방침을 단결의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패권주의일 뿐이다.
진정한 단결을 이루려면
이는 ‘진보대통합 정당’을 주창하는 세력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연이은 분열 과정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과거 진보 정당들 분열의 원인은 좀 더 근본적이었다.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간 제국주의적 갈등 고조와 그에 따른 북한 문제가 있다. 분열의 근본 원인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따라서 강령적 통일을 이루는 민주노동당 모델의 상시적 단일 정당보다는, 정치적 다원성을 인정하는 속에서 평소에는 각 정치 세력의 정치적·조직적 독자성을 보장하고 선거 시기에는 단결 대응을 할 수 있는 느슨한 선거연합정당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단결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정당의 모습은 민주노총이 주도해 만든 총선공투본을 정당 형태로 발전시킨 모습 정도일 수 있겠다.
더 중요한 단결 방식은 투쟁 속에서의 단결이다. 즉, 박근혜 정부와 사용자들이 가하는 공격에 맞서 단결해 공동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치 위기를 이용해 투쟁을 최대한 전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하반기 금융노조, 공공부문 파업에 이어 민중총궐기를 큰 규모로 조직해야 한다.
포데모스
일부 사람들은 진보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대안으로 스페인의 포데모스 모델을 제시한다. 지난 총선에서 진보 정치가 침체했다고 평가하고, 그 원인을 기존 진보 정치 세력의 엘리트주의와 패권주의에 의한 분열과 갈등으로 보는 듯하다. 2014년에 창당한 포데모스는 1년도 안 돼 총선에서 21%의 지지율을 얻으며 스페인 양당 체제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에 진보진영이 포데모스를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진보 정치가 침체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2012년 통합진보당 분열 이후 크게 약화됐던 진보·좌파 진영은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6석을 얻었고, 울산에서 2명의 무소속 노동자 의원이 탄생했다.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노동자 투쟁이 서서히 회복되고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이 일어난 덕분이다.
그리고 포데모스의 성장 배경과 한국 정치 배경은 다르다는 점을 봐야 한다. 포데모스는 2011년 터져나온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경제 위기 이후 긴축 정책과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이 광장 점거 운동은 스페인의 독재 정부가 종식된 이래 최대 규모의 항의 운동이었다. 거대한 운동의 부상이 대중의 급진화를 낳았다.
포데모스는 기존 양당 체제에 대한 거부감뿐 아니라 기성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배신에 반감을 느끼며 자율주의와 아나키즘 정서가 컸던 청년들이 주요 기반이다.
반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저항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조직 노동자 운동이다. 지금도 금융노조, 공공운수노조 등이 파업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부상한 진보·좌파 정치 세력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을 매개로 조직 노동자들과 연계돼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정의당이다. 그런 점에서 포데모스 모델은 한국적 정치 맥락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벌떡교사들” 4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